제 4 장
  
  하루를 못 보아도 석 달이나 된 듯 하네.

  칡 캐러 가세(彼采葛兮)
  하루를 못 보아도(一日不見)
  석 달이나 된 듯 하네(如三月兮)
  쑥 캐러 가세(彼采蕭兮)
  하루를 못 보아도(一日不見)
  세 가을이 간 듯 하네(如三秋兮)
  약쑥 캐러 가세(彼采艾兮)
  하루를 못 보아도(一日不見)
  삼 년이나 지난 듯 하네(如三歲兮)


  그는 연못가에 뒷짐지고 서 있었다. 두 눈으론 쌍쌍이 짝을 찾아 구애하고 있는 고추잠자리 떼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가 고
추잠자리를 보고 있는지 아니면 어른거리는 형상을 무심히 무의식적으로 쫓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휴우~.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한숨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누구를 생각하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
으며 얼굴을 붉히더니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화영은 철쭉나무 그늘에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온갖 청승을 다 떨고 있는 주리홍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숙 주리홍이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화영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옆에 앉아있는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영의 흉내를 따라하고 있던 나비가 그녀의
 손길에 기쁜지 갸르랑거렸다.


  그녀가 온 것도 모르고 있는 고민 없는 고민 다 짊어진 사람마냥, 아니 자기 연민에 푹 빠져 있는 사람마냥 사숙 주리홍은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언니때문일까? 화영은 며칠 전 신도문 소문주인 노천호를 만나고 있을 때 봤던 노천호의 여동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
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용모에 성격까지 아름답지 않던가.

  심상치 않았지.

  화영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에 흐르던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재미있겠다.

  화영은 모처럼만의 유희가 생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신검문과 신도문. 앙숙인 두 문파의 반대 속에 피어하는 한 떨기
흰연꽃같은 사랑.

  기대감에 화영은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천무는 나무에 기대서서 사제인 주리홍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화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의 제자
화영이 쪼그리고 앉아 사제 주리홍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즐거워해? 주리홍을 보고 기뻐한다는 건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건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갑자기 심장이 뜨끔 아팠다. 마치 날카로운 송곳으로 자신의 심장을 사정없이 푹푹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오른
손을 들어 왼가슴을 지긋이 눌렀다. 병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는 즉시 단전에 뭉쳐진 기를 풀어 전신에 돌렸다. 운기해
보아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이상하군.

  천무는 손을 늘어뜨렸다. 그의 앞에 화영이 여전히 미동도 않은 채 사제 주리홍을 보고 있었다.

  찌릿!

  화영을 따라다니고 있는 호랑이가 그의 기척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가 눈빛을 내쏘자 화들짝 그의 눈
길을 피했다. 화영이 그런 호랑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호랑이의 갸르랑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에 아주 잘 들려왔다.

  뜨금.

  또 심장이 쑤셨다. 그는 다시 기를 일주천 시켰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왜 저 호랑이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지?


 
  쟤가 저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진천검은 안력을 돋우었다. 화영을 찾으러 나섰던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말을 걸려했지만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온 몸을 빳빳히 굳힌 채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아들 천무의 시선을 따라가다 연장선상에 놓인
 화영을 발견했다.

  화영이? 왜 쪼그리고 앉아있는 거지? 땅파고 있나?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화영이는 새로 갓 들어온 화영의 쫄다구 호랑이 나비를 옆에 앉혀두고 두 손을 턱에 괴고 앞을 보고 있었다.

  응? 앞?

  진천검은 다시 화영의 시선을 쫓았다. 그 시선 끝에 그의 제자 주리홍이 연못가에 멍하니 서서 연못위를 한창 배회하
며 짝짓기를 하고 있는 잠자리를 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저 놈은 또 왜 저기 처량맞은 표정으로 저기 서 있냐?

  진천검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오는 기척도 눈치 채지 못한 채 화영을 노려보고 있는 아들 천무. 천무가 온 것도 모
른 채 주리홍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화영. 화영이 있다는 기척을 전혀 모르는 듯한 주리홍.

  시름에 잠긴 주리홍을 보고 있는 화영. 주리홍을 보고 있는 화영을 노려보고 있는 천무.

  이게 뭔 일이지?

  그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걸음을 왼쪽으로 서너 걸음 비꼈다.

  청승 떠는 제자. 기뻐하는 화영. 불쾌한 천무.

  화영의 호랑이 나비가 낌새가 이상한지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천무에게서 한줄기 섬뜩한 살기가 뻗어갔다.

  어허! 이 놈 봐라.

  화영이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들 천무의 얼굴이 뭐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오호라!

  그는 기척을 죽였다. 제자와 아들 그리고 화영. 또 엉뚱하게 끼어든 호랑이. 그들의 대결구도를 좀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화영은 조심스레 일어났다. 발이 저릿저릿했다. 그녀는 잠시 다리를 주물렀다. 그녀의 움직임에 호랑이 나비도 따라 일어
섰다. 화영은 호랑이를 보며 조용히 하라 신호를 보냈다. 다리가 풀리자 화영은 살금살금 앞으로 걸어갔다. 망상 내지 상상
에 빠져있는 사숙 주리홍은 화영의 기척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화영은 숨도 멈췄다.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주리홍은 여전히 연못 위를 어지러히 날아다니며 짝짓기를 하고 있는 잠자리
를 보고 있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조그만 더 가면. 화영은 발끝을 주의하며 조심스레 걸었다. 이제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였다. 화영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
며 두 손을 가슴 위로 모았다.

  쟤가 지금 뭘 하려고?

  천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조용조용한 걸음으로 화영이 사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천무는 화영이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 사제 주리홍을 보며 눈썹을 모았다. 화영이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사색에
 잠겨있다니? 그가 처음 보는 사제의 모습이었다.

  화영이 주리홍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잡을 수 있는 거리? 화영이 주 사제를 잡
으러한다는 건가? 왜?

  응? 쟤가 왜 저래?

  진천검은 화영이 살금살금 자신의 제자 주리홍에게 다가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화영의 발걸음에 맞춰 호랑이까지
 발끝으로 걷고 있었다.

  저 짓궂은 미소는? 설마?

  "주 사숙님!"

  "응? 어라? 어, 어, 으아악!"

  풍덩!

  연못위로 물보라가 일었다. 화영은 놀랐다. 심각한 고민에 잠겨있던 주 사숙을 살짝 밀려고 했는데 설마 주 사숙이
균형을 잃을 줄이야.

  "꺄악! 사숙!"

  "사제."

  "제자야!"

  화영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진천검과 천무를 보며 더 놀랐다.

  "숙부, 사부님. 언제 오셨어요?"

  천무는 아무 말 없이 화영을 흘끗 쳐다보더니 연못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천검은 천무와 화영을 번갈아가며 몇 차
례 보다 역시 연못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못 위로 청색의 무목을 입은 사내가 위로 올라왔다.

  "푸악. 콜록콜록!"

  물은 그의 허리 어름에 차 있었다. 주리홍은 허리를 굽히고 심한 기침을 토했다. 얼결에 물을 들이켰나 보다.

  "사숙, 괜찮으세요? 전 단지 사숙님을 놀라게 해주려 살짝 떠민 것 뿐인데."

  "괜찮은가, 사제?"

  "이런, 제자야, 무사하냐?"

  셋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은지 주리홍은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기침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 충격이 가
라앉았는지 주리홍은 기침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부님, 쿨럭쿨럭."

  "그래, 괜찮으냐?"

  "네."

  주리홍은 화영을 바라보았다. 죄책감이 가득담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화영은 울먹이며 주리홍에게 변명했다.

  "전 이럴 줄 몰랐어요, 사숙님. 단지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는데."

  주리홍은 머리를 흔들며 물기를 털었다.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화영이가 다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던 그의 실책이 컸다. 거기
다 균형까지 잃고 연못에 빠졌으니.

  "올라오거라, 홍아."

  "네, 사부님."

  주리홍은 발걸음을 옮겼다. 연못 바닥이 진흙으로 되었는지 푹푹 빠졌다. 그의 사형인 천무가 손을 내밀었다. 그도 마주
손을 내밀려는 찰나였다.

  "꺄악!"

  "어, 어."

  풍덩!

  화영이가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얼결에 화영을 받아든 그는 바닥의 미끄러움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화영과 같이 연못
에 빠지고 말았다.

  손을 내밀던 천무와 화영을 잡으려다 놓친 손을 허공에 그대로 놓아둔 천검이 화영의 뒤에 있던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호랑이 나비는 꼬리를 살레살레 흔들고 있었다. 아마 화영이 개발한 새로운 장난인 줄 알았나 보다. 천검과 천무는 서로를
 바라보다 연못으로 시선을 던졌다.

  "으악! 이 망할 놈의 고양이가! 누굴 미는 거야?"

  "우푸푸, 화영아, 꼬르륵, 그만, 꼬르륵, 바둥거려!"

  주리홍은 날뛰는 화영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며 일어서려 애를 썼다.

  "헉, 괜찮으세요, 사숙님?"

  "네가 그만 바둥거리면 훨 나아질 거야!"

  주리홍의 고함에 화영이 기가 죽었는지 몸부림을 멈췄다. 그 사이에 주리홍은 제대로 설 수 있었다. 그는 화영을 붙잡고 다시 걸었다. 그리고 멍하니 손을 내밀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천검과 천무를 보며 말했다.

  "화영이 좀 받아주세요."

  "어, 응, 그, 그래."

  진천검이 손을 내밀어 화영을 끌어올렸다. 주리홍도 천무의 도움으로 연못 밖으로 나왔다. 주리홍은 다시 심한 기침을 했다. 천무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화영아, 괜찮으냐?"

  "보고도 모르세요, 숙부? 내 저 놈의 고양이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는지 호랑이 나비가 몸을 사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네가 언제나 하는 장난인 줄 알았겠지, 화영아."

  타이르듯 말은 했지만 진천검은 가슴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둘 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자업자득이지."

  천무의 말에 화영은 천무를 한껏 노려보았다. 천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책망하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물에 젖은 화영의 옷엔 군데군데 물풀과 진흙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옷은 물에 젖어 그녀의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
다. 그녀의 드러난 몸을 한 번 훑어보던 천무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응? 어라라? 어? 뭐지?"

  화영이 갑자기 손을 등뒤로 집어넣었다. 화영의 갑작스런 행동에 모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 꺄악!"

  "화영아,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냐?"

  "엉?"

  화영은 온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진천검이 허둥대며 화영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화영은 진천검의 손을 뿌리치며 난리를 떨었다.

  "꺄악, 내 등에 뭐가 들어갔나봐요. 꺄악!"

  펄쩍펄쩍 뛰는 화영을 간신히 붙잡은 천검은 천무를 불렀다.

  "뭐하느냐, 천무야. 당장 화영이를 살피지 않고."

  황급히 달려온 천무가 화영의 등 뒤로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뭔가 물컹한 것이 잡혔다. 미끈한 몸체가 그의 손을 빠져
나가 그녀의 머리위로 뛰어올랐다.

  "개굴개굴."

  머리에 있던 개구리는 자신의 거처인 연못을 보자 바로 뛰어들었다.

  퐁당.

  머리를 물밖에 한 번 내고는 개구리는 헤엄쳐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명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화영의 두 팔을 잡고 있던 진천검도, 화영의 등에 손을 들이밀고 있는 천무도, 입을
 한껏 벌리고 있던 주리홍도.

  바람이 그들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천검이 헛기침을 요란하게 하며 화영의 팔을 놓았다. 천검의
 행동에 천무도 정신을 차린 듯 어색한 표정으로 화영의 등에 넣은 손을 빼냈다.

  "푸, 푸흐흐, 푸하하하하."

  웃음은 주리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뒤를 진천검이 따랐다.

  "크하하하하."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화영은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뭐가 그리 웃을 일이예요?"

  "하하하하, 개구리, 개구리가."

  "으하하하하, 화영이 네 얼굴이, 하하하."

  화영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주리홍과 진천검을 노려보았다. 미친 듯이 웃는 그들의 웃음이 도저히 멈출 기를 보이지 않
자 눈물을 글썽였다. 화영은 팽 돌아 달려갔다.

  "으아앙, 숙모~."

  울며 달려가는 그녀의 뒤를 호랑이 나비가 쫓았다.

  "풋."

  천무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웃음을 손으로 막았다. 그는 급히 헛기침으로 얼버무리며 그를 놀란 눈빛으로 보고
있는 부친과 사제의 시선을 피하며 그 자리를 떴다.

  "제자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냐?"

  "사부님, 저도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뒤에 남은 천검과 주리홍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방금 본 사실을 확인했다.

  "저 녀석 웃은 거 맞지?"

  "네, 그런 거 같습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둘이 동시에 외쳤다.

  "세상에!"

  진천검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내 죽기 전에 저 놈 웃는 거 보는 게 두 가지 소원 중 하나였는데, 오늘, 오늘 봤구나."

  감동에 겨워 부들부들 떠는 진천검을 보며 주리홍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소원은 뭡니까, 사부님?"

  "저 놈 우는 거."

  주리홍은 말없이 사형 진천무가 나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설부화용(雪膚花容)이요, 빙자옥질(氷資玉質)이라. 상심에 젖은 저 모습, 사람의 애간장을 끊도다.

  연못 목교(木橋) 위에 시름에 잠긴 미녀가 한 떨기 비 맞은 해당화마냥 애닯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눈 같은 피부, 꽃 같은
 용모.

  미녀는 눈을 들어 하늘을 나는 한 쌍의 꾀꼬리를 보며 한숨을 짓는다. 꽃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듯
한 미녀였다. 보라 색 궁장에 머리엔 원앙잠(鴛鴦簪)을 위에 살짝 꽂았으며 삼단같이 검은 머리는 허리에 드리우고 있었다.

  휴우~.

  한숨 소리가 연못을 맴돌다 사방으로 퍼졌다.

  화영은 그림과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속으로 한 마디 했다.

  여기나 저기나 똑같군.

  꽃그늘 아래 숨어 화영은 미오를 살펴보고 있었다. 호랑이 나비는 자신의 코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나비 한 쌍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다.

  어쩌지?

  화영은 이대로 나가서 그녀를 부를지 아니면 저 모습을 그대로 더 구경해야할지 고민했다. 보아하니 그녀의 상태는 사숙
주리홍의 증상과 같았다.

  한 쪽만의 일방적인 감정은 아닌 것 같군. 사숙 주리홍 혼자만 상사병에 걸린 게 아닌 거 같았다. 이곳 역시 똑같이 상사
병이란 불치의 병에 걸린 여인이 연못 위 펄펄 나는 정다운 암수 꾀꼬리를 보며 한숨 짓고 있었다.

  화영은 볼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둘을 상사병으로 죽게 할 수 없지. 암, 젊은 나이에 불치의 병에 걸려 죽게 할 수 없고 말고.

  날 찾아온 거 아닌가?

  천호는 쪼그리고 앉아 여동생을 보고 있는 화영을 보며 의문에 잠겼다.

  유화영. 분명히 자신의 이름을 대며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말야. 시간이 지나도 화영이가 그를 찾아오지 않자 그가
찾으러 나왔다. 근데 내원에서 그녀를 발견할 줄이야.

  한숨 짓고 있는 여동생. 그걸 보며 생각에 잠긴 화영. 화영이 옆에 앉아 나비 한 쌍에게 앞발을 내젓고 있는 호랑이.

  여동생이 저리 변한 건 며칠 전부터였다. 그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저리 변했다. 며칠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시름에 잠긴 동생을 보고 있노라니 그 역시 마음이 안 좋았다. 동생이 왜 저리 변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
만 절대 입 밖에 내어 여동생을 위로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위의 어르신들 귀에 들어간다면?

  그 날로 여동생의 인생은 완전히 감옥살이가 될 것이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천호는 나무에 기대 서서 그들의 행동을 자세히 살폈다.

  대체 뭔 일이야?

  노천도 신도문 문주는 불쾌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신검문의 제자가 이곳에 다시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부랴부랴 찾아 나섰다.

  나무에 기대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멍하니 그 빌어먹을 문파의 여제자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발견하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꼭 얼빠진 모습이지 않은가.

  수상하군.

  아들의 모습도 수상하고 요즘 딸의 모습도 수상했다. 그가 모르는 뭔 일이 있나보다. 그게 그를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아들 노천호를 노려보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아들은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 얼굴은 물론 자신과
닮았지만 저 성격은 누굴 닮았는지. 아무에게나 헤헤거리고 아무 여자나 쫓아다녔다.

  어쩌다가 저리 변했을까?

  아들의 바람기는 그가 생각하기에도 좀 심했다. 이 여자 저 여자 가리는 여자 없이 쫓아 다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저절
로 속에 열불이 차 올랐다. 저 나이가 되면 진득하게 마음을 잡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일가를 이루어야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의 아들은 혼인에 뜻을 두지 않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며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오죽하면 풍류공자란 별호가 더 붙었을까.

  그와 장로들이 혼인을 하라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을 해도 그의 아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불쌍해서
 절대 혼인은 못한다고 뻗대는 녀석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부드럽고 상냥하다? 세인들은 그렇게 말을 하지만 천만의 말씀. 저 놈만큼 냉정한 놈이 또 있을까? 부드
러운 모습은 겉모양일 뿐이다. 저 놈의 속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그는 아들에게 시선을 돌려 화영을 쳐다보았다.

  요즘 천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여인. 신검문의 제자로 천호의 호적수 진천무의 제자. 그리고 천무를 사랑하고 있
는 여인.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흠, 그것도 재미있겠군.

  노천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호적수 진천검이 며느리로 점찍은 여인이었다. 만약 저 여인을 천호가
빼앗는다면?

  크크크크, 천검이 놈, 환장할 거야.

  불길같이 노해 펄쩍펄쩍 뛰는 자신의 호적수의 모습을 상상하고 혼자 즐거워했다. 한참을 속으로 웃던 그는 화영이를
지나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자신의 딸이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시름에 잠긴 모습으로.

  요 며칠 저리 변한 게 무엇 때문일까? 그는 딸의 변화된 모습에 속이 상했다. 저러다 몸져 눕는 게 아닐까하는 정도로
딸은 식음을 거의 전폐하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화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다리를 풀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쫙 펴고 앞으로 나갔다. 덤풀에 옷깃 스치는 소
리가 조용히 들렸다. 그 소리에도 목교 위의 미인은 고개를 들지 않고 시름에 잠겨 있었다.

  화영은 다리 끝에 서서 그녀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다리를 밟았다. 나무 특유의 삐걱대는 소리가 울렸다
. 이리 큰 소리가 났건만 그녀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화영은 헛기침을 크게 했다. 이대로 살금살금 몰래 다가가
 툭 치면 재미있겠지만 저번처럼 연못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

  "미오 언니?"

  대답이 없었다.

  "미오 언니!"

  조금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화영은 목을 가다듬었다.

  "미오 언니!"

  "꺄악!"

  화영의 부름에 미오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그녀를 부린 이가 화영임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사람이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언니?"

  "아, 화영 동생이군. 놀랐잖아."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셨잖아요."

  화영이 볼멘 소리에 미오는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동생."

  "뭘 고민하고 계신 거예요, 언니? 심각해 보였어요."

  짐작을 넘어 확신에 가깝게 그녀가 고민하는 내용을 환히 꿰뚫고 있지만 그래도 직접 듣는 게 낫겠지? 화영은 궁
금한 빛을 숨기지 않고 미오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여름햇빛을 식히는 바람이 불어 수면 위로 물결을 일으켰다. 미오가 연못에 일렁이는 물결을 멍하니 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화영의 질문을 들었음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영은 조용히 기다리며 수면을 바라보았다.

  이곳 연못에도 새하얀 수련이 아름다운 자태를 수줍게 뽐내며 피어있었다. 수련 잎 위에는 청개구리가 얌전히 앉
아있었다. 개구리…. 개구리…, 개구리! 화영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마음이 심란하구나."

  낮은 목소리에 화영은 개구리를 노려보던 것을 멈추고 미오를 쳐다보았다. 마음이 심란하다라…. 심란할만도 하지.
여기서 운을 띄워볼까? 아니야, 아직은 아냐.

  화영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오의 손을 잡았다.

  "언니, 날도 좋은데 우리 같이 놀러가요."

  "놀러?"

  "네. 회하 강변으로 놀러가요, 언니. '능허루(能虛樓)'에서 보는 풍경이 아름답더라구요."

  화영이 미오의 손을 끌자 미오가 난처한 낯빛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대로 밖에 나갈 수 없어."

  "에이, 무슨 상관이에요. 언니는 이대로도 아름다워요. 제가 질투가 날만큼."

  화영의 권유에 미오는 마지못한 척 끌려갔다.

  귀를 쫑긋 세워 둘이 하는 말을 몰래 들었지만 별다른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천호의 이마에 주름이 한 줄 생겼다.

  "쟤가 화영이란 아이냐?"

  천호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그의 부친이 그의 옆에 서서 여동생과 화영을 유
심히 살피고 있었다.

  "왜 말이 없느냐?"

  "아, 네, 아버님. 화영 소저입니다."

  노천도가 뒷짐을 지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호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왜 신검문의 아이가 여기 드나드는 게냐?"

  "화영 소저는 특별합니다."

  "특별?"

  노천도가 뜻밖의 말에 놀라 천호를 바라보았다. 아들 천호가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특별하지요. 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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